알렉산드르 코르사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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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드르 코르사코프는 러시아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프레오브라젠스키 근위 연대 생도로 군 복무를 시작하여 여러 전쟁에 참전했고, 25세에 체르니고프 머스킷 연대 중령으로 임명되었다. 1798년에는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독일로 파견되었으나 스위스에서 프랑스군에 패배하여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이후 알렉산드르 1세의 즉위 후 기병대장으로 재임명되었고, 리투아니아 총독을 역임하며 투스쿨레나이 영지를 재건했다. 그는 1840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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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코르사코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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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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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림스키-코르사코프 |
로마자 표기 | Aleksandr Mikhaylovich Rimskiy-Korsakov |
출생 | 1753년 8월 24일 |
사망 | 1840년 5월 25일 |
국적 | 러시아 제국 |
경력 | |
직업 | 군인 |
소속 | 러시아 제국군 |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코르사코프는 생도 신분으로 프레오브라젠스키 근위 연대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시작했으며, 25세에 체르니고프 머스킷 연대의 중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788년과 1789년에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했고, 러시아-스웨덴 전쟁에도 참전했다. 그 후 셈요노프 연대의 근위대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아르투아 백작의 잉글랜드 동행 임무를 맡았다. 그곳에서 그는 요시아스 폰 코부르크 공이 지휘하는 군대의 러시아 관찰자로서 플랑드르로 갔다. 플뢰루스 전투에 대한 그의 차르 부인에게 보낸 보고는 그의 호감을 얻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그는 황제 파벨 1세가 1799년 프랑스 혁명 전쟁에 대처하기 위해 소환할 때까지, 발레리안 주보프 백작 휘하에서 페르시아 원정에 참전했다. 1797년, 코르사코프는 보병 감찰관으로 승진했고, 이듬해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2. 1. 초기 군 복무
코르사코프는 프레오브라진스키 근위 연대의 생도로서 군복무를 시작했으며, 25세에 체르니고프 머스킷 연대의 중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러시아-튀르크 전쟁과 러시아-스웨덴 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러시아 친위대의 셈요노프 연대 소장이 되었고, 아르투아 백작과 동행하여 잉글랜드로 갔다. 그곳에서 요시아스 폰 코부르크 공이 지휘하는 군대의 러시아 참관인으로 플랑드르로 갔다. 플뢰루스 전투에 대한 그의 보고는 황제의 호의를 얻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그는 발레리안 주보프 백작의 휘하에서 페르시아 원정에 참전했다가, 프랑스 혁명 전쟁에 대처하기 위해 파벨 1세에 의해 소환되었다. 1797년 코르사코프는 보병 감찰관으로, 이듬해 중장으로 진급했다.2. 2. 페르시아 원정과 파벨 1세 시기
코르사코프는 생도 신분으로 프레오브라젠스키 근위 연대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시작했으며, 25세에 체르니고프 머스킷 연대의 중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러시아-튀르크 전쟁과 러시아-스웨덴 전쟁에 참전했다. 그 후 셈요노프 연대의 근위대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아르투아 백작의 잉글랜드 동행 임무를 맡았다. 그곳에서 그는 요시아스 폰 코부르크 공이 지휘하는 군대의 러시아 관찰자로서 플랑드르로 갔다. 플뢰뤼스 전투 (1794)에 대한 그의 차르 부인에게 보낸 보고는 그의 호감을 얻었고,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그는 발레리안 주보프 백작 휘하에서 페르시아 원정에 참전했다. 1797년, 코르사코프는 보병 감찰관으로 승진했고, 이듬해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3. 1799년 스위스 전역
1798년 파벨 1세는 알렉산드르 코르사코프에게 30,000명의 원정군을 맡겨 프랑스 공화국과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도록 독일로 파견했다.[3][1] 1799년 초, 이 부대는 스위스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는 임무로 전환되었다.[3][1] 코르사코프는 5월에 러시아를 출발하여 90일 만에 슈토흐아흐에 도착, 29,463명의 병력을 이끌고 취리히로 진군하여 오스트리아 장군 프리드리히 폰 호체의 25,000명 군단과 합류했다.[3][1]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의 군대가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에서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지형과 적의 방해로 인해 진군이 지연되었다.[3][1] 그동안 코르사코프는 취리히 근처에서 안일하게 대기했다.[3][1] 앙드레 마세나 휘하의 프랑스군은 1799년 9월 25일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 이점을 활용하여 공격,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3][1] 코르사코프는 프랑스군의 추격이 거의 없었고 수보로프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샤프하우젠으로 급히 후퇴했다.[1]
이후 코르사코프는 라인강 동쪽 샤프하우젠과 콘스탄츠 사이의 되르플링겐(Dorflingen Camp)에 자리를 잡고, 마세나가 수보로프를 상대할 수 있도록 했다.[3][1] 콩데가 지휘하는 그의 좌익은 10월 7일 콘스탄츠에서 쫓겨났고, 같은 날 뷔징겐 암 호흐라인에서 슐라트를 향해 진격했지만, 결국 마세나에게 밀려 라인강 좌안을 포기했다.[3][1] 그는 10월 18일 린다우에서 수보로프의 생존자들과 합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휘권을 박탈당했다.[3][1] 그는 불명예스럽게 로스토프 머스킷티어 연대의 사령관 직에서 해임되었다.[3][1] 연합군은 보헤미아로 방향을 돌렸고, 파벨 1세는 겨울을 위해 군대를 러시아로 소환했다.
3. 1. 스위스 원정과 제2차 취리히 전투
1798년 파벨 1세는 알렉산드르 코르사코프에게 30,000명의 원정군을 맡겨 프랑스 공화국과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도록 독일로 파견했다.[3][1] 1799년 초, 이 부대는 스위스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는 임무로 전환되었다.[3][1] 코르사코프는 5월에 러시아를 출발하여 90일 만에 슈토카히에 도착, 29,463명의 병력을 이끌고 취리히로 진군하여 오스트리아 장군 프리드리히 폰 호체의 25,000명 군단과 합류했다.[3][1]알렉산드르 수보로프의 군대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서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지형과 적의 방해로 인해 진군이 지연되었다.[3][1] 그동안 코르사코프는 취리히 근처에서 대기했다.[3][1] 앙드레 마세나 휘하의 프랑스군은 1799년 9월 25일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 이점을 활용하여 공격,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3][1] 코르사코프는 샤프하우젠으로 급히 후퇴했다.[1]
이후 코르사코프는 라인강 동쪽 샤프하우젠과 콘스탄츠 사이의 도르플링겐 진영에 자리를 잡고, 마세나가 수보로프를 상대할 수 있도록 했다.[3][1] 그의 좌익은 10월 7일 콘스탄츠에서 쫓겨났고, 같은 날 뷔징겐 암 호흐라인에서 슐라트를 향해 진격했지만, 결국 마세나에게 밀려 라인강 좌안을 포기했다.[3][1] 그는 10월 18일 린다우에서 수보로프의 생존자들과 합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휘권을 박탈당했다.[3][1] 그는 불명예스럽게 로스토프 총사 연대의 대령으로 해임되었다.[3][1] 연합군은 보헤미아로 향했고, 파벨 1세는 겨울 동안 군대를 러시아로 철수시켰다.[3][1]
3. 2. 수보로프와의 합류 및 지휘권 박탈
1798년 파벨 1세는 프랑스 공화국과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에 합류하기 위해 30,000명의 원정군을 코르사코프에게 위임하여 독일로 파견했다.[3] 1799년 초, 병력은 스위스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기 위해 방향을 전환했다.[3] 5월에 러시아를 떠나 코르사코프는 90일 만에 슈토카히에 도착했다.[3][1] 29,463명의 병사를 거느린 그의 사령부는 취리히로 진군하여 오스트리아 장군 프리드리히 폰 호체의 25,000명 군단과 합류했다.[3][1]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의 군대는 알프스를 통과한 후 이탈리아에서 합류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지형과 적의 행동이 수보르프의 진군을 가로막았다.[3][1] 그 동안 코르사코프는 과신한 상태에서 편안한 상태로 취리히 근처에서 기다렸다.[3]이를 최대한 활용한 앙드레 마세나 휘하의 프랑스군은 1799년 9월 25일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 공격을 가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3] 프랑스군의 추격이 거의 없자 수보르프는 그의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다.[3] 코르사코프는 라인강 동쪽 샤프하우젠과 콘스탄츠 사이의 도르플링겐 진영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 남아 마세나가 수보로프를 상대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3][1] 그의 좌익은 10월 7일 콘스탄스에서 쫓겨났고, 같은 날 뷔징엔에서 슐라트를 향해 진격했지만, 결국 라인강 좌안을 포기하고 마세나에게 밀려났다.[3][1]
그는 10월 18일 린다우에서 수보로프의 생존자들과 합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휘에서 해임되었다.[3][1]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불명예로 로스토프 총사 연대의 대령으로 해임되었다.[3] 연합군은 보헤미아로 향했고, 그곳에서 폴 1세는 겨울 동안 군대를 다시 러시아로 불러들였다.[3][1]
4. 이후 생애
1801년 알렉산드르 1세 황제의 즉위와 함께 코르사코프는 GvC 기병 장군으로 재임명되었다.[4] 그는 1806년부터 1809년까지 리투아니아의 총독으로 재직했으며 1812년 4월부터 6월까지 재임했다.[4] 프랑스군이 접근하자 6월 28일 미하일 안드레아스 바클레이 드 톨리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3선을 위해 복귀했다.[4] 1812년 12월 8일부터 1830년까지 리투아니아 총독으로 재직했다.[4]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이 살았던 빌뉴스의 투스쿨레나이 영지 재건을 명령했다.[4] 1830~31년 폴란드 봉기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소환된 코르사코프는 러시아 제국 국가 평의회의 구성원이 되었다.[4] 그는 1840년에 사망했다.[4]
4. 1. 알렉산드르 1세 시기의 복권과 리투아니아 총독
알렉산드르 1세의 즉위와 함께 코르사코프는 기병대장으로 재임명되었다.[4] 그는 1806년부터 1809년까지 리투아니아의 총독으로 재직했으며[4] 1812년 4월부터 6월까지 재임했다.[4] 프랑스군이 접근하자 6월 28일 미하일 안드레아스 바클레이 드 톨리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4] 1812년 12월 8일부터 1830년까지 리투아니아 총독으로 재직했다.[4]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이 살았던 빌뉴스의 투스쿨레나이 영지 재건을 명령했다.[4] 1830~31년 폴란드 봉기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소환된 코르사코프는 러시아 제국 국가 평의회의 구성원이 되었다.[4] 그는 1840년에 사망했다.[4]4. 2. 투스쿨레나이 장원과 빌뉴스
알렉산드르 1세의 즉위와 함께 코르사코프는 기병대장으로 재임명되었다.[4] 1806년부터 1809년까지 리투아니아의 총독으로 재직했으며 1812년 4월부터 6월까지 재임했다.[4] 프랑스군이 접근하자 그는 6월 28일 미하일 안드레아스 바클레이 드 톨리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1812년 12월 8일부터 1830년까지 리투아니아 총독으로 다시 복귀했다.[4]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이 살았던 빌뉴스의 투스쿨레나이 영지 재건을 명령했다.[4] 1830~31년 폴란드 봉기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소환된 코르사코프는 러시아 제국 국가 평의회의 구성원이 되었다.[4] 그는 1840년에 사망했다.[4]4. 3. 말년
알렉산드르 1세 황제가 1801년에 즉위하면서 코르사코프는 기병대장으로 재임명되었다.[4] 그는 1806년부터 1809년까지 리투아니아 주지사였으며, 빌뉴스를 거점으로 활동했고, 1812년 4월부터 6월까지 다시 주지사를 역임했다.[4] 프랑스군의 접근에 따라 6월 28일 미하일 안드레아스 바클레이 드 톨리의 명령으로 철수했지만, 1812년 12월 8일부터 1830년까지 세 번째 임기로 리투아니아 총독으로 복귀했다.[4] 이 기간 동안 그는 빌뉴스에 있는 투스쿨레나이 영지의 재건을 명령했으며, 그곳에서 거주했다.[4] 1830~1831년의 폴란드 봉기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소환된 코르사코프는 러시아 제국 국가 평의회의 구성원이 되었다.[4] 그는 1840년에 사망했다.[4]참조
[1]
서적
Marengo and Hohenlinden
[2]
서적
The Russian Officer Corps in the Revolutionary and Napoleonic Wars, 1792–1815
New York
[3]
서적
Marengo and Hohenlinden
[4]
서적
The Russian Officer Corps in the Revolutionary and Napoleonic Wars, 1792–1815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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